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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되는 문장수집 #3] 타인에 대한 연민_마샤 누스바움

  • [뿌리가 되는 문장수집 #3] 타인에 대한 연민_마샤 누스바움

    작성자 도희 on 5월 9, 2025 at 6:35 오후

    타인에 대한 연민_마사 누스바움

    #두려움 #연민 #이해 #포용 #관용

    ●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단연 ‘두려움fear’이다. 현대인들은 다양한 이유에서 두려움을 갖게 된다.

    ● 안 그래도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던 소수자 집단이 지목되고 사람들의 두려움은 그들에게 투사된다. ‘여러분들의 두려움은 저들을 공격하고 저들을 제거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선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 사람들은 삶의 기준이 낮아지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어려움과 불확실성을 대면하기보다 절대자인 악당에게 매달리거나 환상을 품는다.

    ● 나는 학생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전한다. 첫째, 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미국 사회는 결코, 완벽한 상태로 존재한 적이 없다. 장기간의 노력과 협력, 희망과 연대로 가능한, 여전히 꿈틀거리는 열망이자 과정일 뿐이다.

    ​둘째, 지금 이 순간 평등을 향한 우리의 행진이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대재앙을 목도한 상황은 아니다. 희망과 노력으로 위대한 선을 완수해 나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두려움은 앞서가려는 경향이 매우 큰 감정입니다. 이기적이고 경솔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곧잘 이어지죠.

    ● 절대 왕정은 아래로부터의 두려움을 먹이로 삼습니다. 군주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복종을 이끕니다. 외부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자발적 예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돌봄과 보호를 원하니까요.


    ​● 현재의 사람들이 원하는 결혼은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양측 모두의 신뢰를 필요로 하는 더 균형 잡힌 방식입니다. 이 신뢰는 두려움에 의해 손상됩니다. 상대방이 나의 삶과 목표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면 작전을 짜 상대를 속이면서 자신을 보호하려 할 것입니다.


    ● 내게 철학은 권위적인 선언이 아니다. 타인보다 더 깊이 있다는 주장도, 현명하다는 과시도 아니다. 철학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겸손한 마음을 바탕으로 진실하게 논쟁을 주고받겠다는 약속이다. 평등한 인간으로서 기꺼이 상대의 의견을 듣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찰하는 삶을 뜻한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식 개념에 따르면 철학은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위협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공허한 주장을 하지 않되, 듣는 이가 언제든 반박할 수 있는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사고의 구조를 세운다.


    ● 인간은 세상에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다. (중요한 사실은 영영 준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아기의 입장에서는 신뢰도 규칙도 안전도 없다. 단기간의 제한된 경험으로 아기는 지금 이 순간의 고통만이 실재하며 즐거운 안락의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다시 불안과 공포가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 짦은 즐거움의 순간도 곧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희석되어버린다.


    ● 약간의 짜증이나 불편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누군가 나에게 어떤 일을 했으며 그 일은 잘못되었다는 인과적 사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자각만 있으면 된다.

    ● 두려움은 내면의 강한 느낌을 동반하는데 이는 흔히 신체의 ‘떨림’으로 드러난다.

    ​● 두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회가 필요하지 않다. 오직 자신과 위협적인 세상만 있으면 된다.


    ● 아기는 결국 ‘엄마가 옆에 있을 대 혼자 노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부모가 눈에 보이거나 목소리가 들리는 상태에서도 부모를 부르지 않고 스스로 즐겁게 놀 수 있게 된다.

    ● 안정감과 자신감이 건강한 상호 관계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아기는 부모를 자기 요구의 확장이 아닌 전인적 인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 보통 이 단계가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라고 위니킷은 말한다. 아기는 자신이 사랑하고 받아들였던 대상이, 자신의 요구가 좌절되었을 때 공격성을 표출하고 분노의 화살을 돌렸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 자신의 공격성에 대한 실망은 점차 ‘걱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발전한다. 파괴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고 부모를 파괴해서도 안 된다. 도덕성은 사랑과 함께 작용한다. 아기가 자신의 공격성의 해학을 느끼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아이들은 스스로 감정적 성숙을 이룰 수 없다. 아이들에게는 안정적이고 애정 어린 돌봄, 자신의 공격성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사랑이 굳건할 거라는 안심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라도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관계의 문제다.

    ● 최초의 두려움은 배고픔, 갈증, 어둠, 축축함, 그리고 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반응한다.

    ● 두려움은 자신의 행복에 위협이 임박했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 기술적 영역에서 충분하고 포괄적인 연구가 우선되어야 하지만 대중은 가끔 과학보다 두려움을 따른다.

    ● ‘서양’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인종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약간의 유대교인이 포함된) 기독교인들이자 (라틴아메리카는 제외되었으므로) 백인들을 뜻한다.

    ●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상상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려움의 대상은 얼마나 정확하며, 얼마나 명확한 정보를 근거로 하는가? 두려움의 대상이 제한적이라면 심각한 다른 문제들을 도외시하고 한 가지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우리가 무력하지 않다면 원하는 것을 직접 손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무력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의지해야 한다. 타인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늘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그때 우리는 문제의 ‘장본인’을 파악하고 비난한다. 시끄럽게 분노함으로써 나의 의지를 실행하려는 전략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관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우리에게 나쁜 사람들이 된다.

    ● 철학자들은 정의하기를 좋아하고 정의는 사고를 정리하는 데 유용하다.

    사건은 늘 발생하고 재앙은 그냥 재앙일 뿐인 경우가 많다. 질병과 고난은 그저 질병과 고난이다. 의료진도 우리를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구하지 못하며 공정하고 슬기로운 사회 정책도 자연재해나 예상치 못한 경제적 흐름으로 야기된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군주적 사고방식으로 자신의 편의를 위해 세상이 움직이길 바란다. 불행한 사건을 특정인의 탓으로 돌리면 자아가 충족되면서 깊은 위안을 받는다. ‘나쁜 사람’을 설정해 비난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무력감 대신 통제감을 갖는다.

    ● 분명한 누군가의 잘못이거나 부당한 정책 등 원인이 확실한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이 혼란스럽고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처럼 악마로 만들기 쉬운 집단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 예를 들어 부모님이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면, 의사의 잘못이라고 믿고 자신의 슬픔을 의료 과실 소송으로 몰고 가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다.

    ● 음식을 찾아 숲을 헤매는 ‘헨젤과 그레텔’의 문제는 부모가 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돌볼 여유가 없는 상황과 굶주림이다. 하지만 동화는 이 현실적인 문제를 숲에 살면서 아이들을 생강쿠키로 만드는 비현실적인 마녀의 탓으로 돌린다. 이야기의 본질은 노화와 돌봄 부족이다. 할머니는 도움이 필요하고 가족은 멀리 산다. 하지만 할머니 집으로 쳐들어온 늑대를 탓하며 구조적 해결책이 필요한 난제에서 관심을 돌린다. 두 전래 동화 모두 악당은 죽고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는 정돈된 세상을 갈망하기 때문에 간단하고 헛된 해결책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b style=”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family: inherit; font-size: inherit;”> 복잡한 진실을 파고드는 일은 어렵고 개인의 기쁨을 보장하지 않는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사는 것보다 마녀를 불태우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 사랑과 두려움의 기본은 통제할 수 없는 누군가 혹은 어떤 대상을 향한 강한 애착이다.

    ●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곧 고통을 뜻한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분노를 한번에 몰아내는 해결책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랑을 지킨다는 것은 곧 두려움도 유지한다는 뜻이다.


    ● 루크레티우스는 모든 지위 경쟁의 원인이 두려움이며, 타인을 무시하면서 스스로 강하다고 느끼는 것이 스스로를 위안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했다.

    범죄 증가는 자료 수집과 보도 증가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혐오범죄가 급증했다며 당황하거나 즉각 트럼프 지지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미국이 특히 인종 관련 문제에서 (종교, 성별, 성적 지향으로 인한 범죄 역시 포함해) 적대적이었던 추악한 역사를 갖고 있음을 기억하고, 혐오 범죄의 증가 여부에 상관 없이 이를 어떻게 멈출지 생각해야 한다.


    ● ​해법을 찾으려면 문제의 뿌리를 이해해야 한다. 타인을 배제하는 감정에 대한 철학적-심리학적 분석이 우리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더 큰 호해와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지 밝혀줄 것이다.

    ● 두려움은 특히 분노-비난과 결합할 대 수많은 부적절한 행동을 추동한다.


    ● ​<b style=”background-color: transparent; font-family: inherit; font-size: inherit;”>혐오는 학습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 혐오는 배변 훈련 시기에 처음 관찰된다. 그렇다고 혐오가 완전히 학습된 행동이라는 뜻은 아니다. 언어 능력처럼 타고나지만 발현까지 시간이 걸린다.

    ● 혐오감을 유발하는 것 목록에 동물과 인간의 사체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부패에 대한 상상이 원초적 혐오의 모든 대상을 서로 연결해준다.

    ● 원초적 혐오는 비인지적인 단순한 감각 반응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폴 로진Paul Rozin과 그의 동료들의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혐오는 두드러진 인지 능력이었다.

    ● 혐오에는 대상이 ‘오염’되었다는 생각, 즉 섭취하거나 만지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학자들은 혐오가 오염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접촉에 대한 극도의 증오라고 결론내렸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포함될 수 있지만 그것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그것의 근원이 내 안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거부일 수 있다.

    ● 동물 중 오직 인간만이 동물성에 대한 불안을 표출한다.

    ● ​인간의 삶 대부분이 타인, 혹은 자신을 혐오하지 않기 위한 반복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 결국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피해도 계속 자신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면, 인간 사회에서 너무 흔한 전략의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 훌륭한 전략은 다음과 같다. ​특정 집단을 우리보다 더 동물적이라고,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냄새가 나고 성적이며 죽음의 악취가 풍기는 집단이라고 규정하면 어떨까? 그런 집단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지배하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닌 그들이 동물이고 더럽고 냄새가 나는 대신 우리는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발 밑에 있다. 우리가 그들을 지배한다.

    ​ 이와 같은 모순적 사고가 골치 아픈 동물성과 자신과의 거리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다. 다시 전래 동화로 돌아가보자. 어린아이들은 기아나 질병, 삶의 각종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이성적 사고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못생기고 불구인 짐승, 도깨비, 마녀, 인간의 말을 하는 동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에게 두려움을 투사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면 삶이 더 안전해질 거라고 믿는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마녀들은 혐오스럽고 역겨운 존재로 묘사되었다.

    ● 그들로부터 오염을 피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회피하고 초월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투사적 혐오 projective disgust’​개념의 토대다.

    ● 여성의 신체를 향한 혐오는 독특한 방법으로 두려움과 욕망이 결합한다.

    ● 이와 같은 혐오는 사회적으로 건설적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b class=””>사람들이 혐오를 느낄 때 원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회피이기 때문이다.​

    ● 혐오는 대상에 대한 환상을 먹고 자라므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이를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두려움은 종종 감정을 장악하고 이를 유독한 보복 욕구로 변화시킨다.

    ● ‘지금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힘을 모아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말하는 것과, 지배 계급이 잘못되길 바라고 행복을 빼앗고 싶어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 시기는 ‘내가 잘살기 위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외치며 사회적 협력을 제로섬 게임으로 만든다.

    시기심은 타인이 가진 것에 주목하고 자신의 상황은 그보다 못하다고 비교하면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라이벌이 필요하고 (집단일 수도 있다) 시기하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성질이나 재화가 필요하다. 시기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좋은 것을 라이벌이 갖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 시기와 모방은 두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모방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중요한 두 번째 차이는 바로 제로섬 경쟁이 아닌 성취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 시기심의 악의는 보통 ​무력감​에서 발생하는데 이는 원초적 두려움과도 관련이 있다. 시기하는 사람들은 라이벌이 가진 것을 자신은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열등감을 경험하며 불행하다고 느낀다.

    ● 시기와 관련된 두 번째 감정은 ​질투​다.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시기와 질투 모두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한 라이벌에 대한 적대감을 포함한다. 하지만 ​질투는 내가 소유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관련이 있다.​ 인간관계에서의 사랑과 관심이 그렇다. 시기가 대상의 부재에 대한 감강니 반면, 질투는 가치 있지만 불안정한 대상의 존재 자체에 집중한다.

    ● 시기심은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지위, 부, 명예, 다른 경쟁적인 재화 등) 시기심이 집중하는 대상은 대부분 사회에서 불공평하게 분배되어 있으며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불안을 느낄 때 우리는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 ​분노와 마찬가지로 시기는 라이벌을 향한 적대적 감정을 동반한다. 근본적 차이가 있다면 지위 불안에 기반한 분노는 모욕이나 상처를 받았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반대로 시기는 라이벌이 행복하기만 하면 느낄 수 있다.

    ● 니체의 ‘르상티망Ressentiment(막연한 분노)’은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느끼는 시기심이지만 그 감정에는 창조성이 있다. 힘 없는 자들이 반대로 자신에게 힘이 있고 경쟁자들이 애처로워지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 ​우리는 왜 희망을 품어야 하는가? 세상은 희망적인 태도를 가져야 할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희망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늘 선택의 문제다.

    ● 희망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희망이 가치 있는 사랑과 신뢰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 절망과 냉소적 체념은 과감한 행동이나 헌신적인 노력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

    ● 칸트가 옳다. ​노력하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하다.​

    ● 희망은 어려운 목표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정말 가치 있는 목표라면,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는 칸트의 말에 동의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희망을 품어야 하는 강력한 이유다.

    ● 두려움은 타인의 독립성에 대한 믿음보다 통제하고자 하는 군주의 욕망과 비슷하다.

    ●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은 통제하려는 사람, 군주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내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도 좋지 않으며 불확실성과 취약성의 여지도 없다. 여기에 희망은 없다. 내가 원하는 것 전부를 갖지 못했으며, 신뢰할 수 없는 타인이나 기회에 의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희망은 두 가지 다른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로 믿음과 사랑이다.

    ● ​모든 사람이 언제나 모든 사람을 사랑할 필요는 없으며 그저 변화를 만들 만큼만 사랑한다면 된다고 믿는다.​

    ● 인간 관계는 더 섬세한 믿음이 필요하다. 성 바울의 말대로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면 타인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만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상대에게도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고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사람들은 타인의 불가사의함에 매혹되었고 그래서 기계와 진짜 사람을 구분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구분할 방법은 없다. 오직 믿는 수밖에.

    ● 시와 소설,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형태에 인간성을 부여하는 방법을 배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증거를 넘어서는 관용이 필요하다.

    ● 사람들은 선한 행동을 기대받으면 보통 그 기대에 맞춰 살아가려고 한다.

    • 이 토론은  도희에 의해 3 주, 2 일 전에 수정되었습니다.
    도희 작성 3 주, 2 일 전에 1 회원 · 0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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